<로마 위드 러브> - 로마와 뉴욕 사이 images du cinema

                                                                                              이미지 출처 allocine.fr

유럽을 떠돌며 영화를 찍는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는 일은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홈경기에서 더 좋은 성적을 내는 투수가 어웨이 경기에서만 등판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다시피, 우디 앨런의 자리는 유럽이 아니라, 뉴욕이다. 물론 우디 앨런의 영화를 진정으로 사랑한 관객들은 유럽의 관객들, 특히 프랑스의 관객들이었고, 우디 앨런 스스로도 어떻게 하면 자신이 유럽의 거장과 같은 영화예술가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유럽 영화 콤플렉스를 그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안토니오니의 촬영감독이었던 카를로 디 팔마 나 잉마르 베리만의 촬영감독이었던 스벤 닉비스트와 영화를 찍던 시절에 그의 진정한 걸작들은 그의 타고난 코메디언 기질과 유럽 예술 콤플렉스가 교차하는 미묘한 지점에서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우디 앨런은 항상 뉴욕에서 영화를 찍었었고, 뉴욕 자체가 그의 영화였기에, 뉴욕으로 거의 돌아가지 못하고 유럽에서 찍는 그의 영화들은 마치 관광객의 시선처럼 그 장소에 스며들지 못하고 떠도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당신이 우디 앨런의 영화들의 진정한 팬이 아니라면, 그의 최고의 흥행작이 됬던 <미드 나잇 인 파리>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그리고 이 영화 <로마 위드 러브>에서 나오는 낭만적인 배경에서 다양한 러브 스토리와 귀여운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이 영화에서 나오는 풋풋한 느낌을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디 앨런의 필로그래피의 역사를 지켜보았던 자라면, 그의 자기파괴적인 유머와 실존적인 무게가 뒤섞인 속에,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들마저 서슴없이 지껄이던, 뉴욕의 가을을 주로 보여주던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던 그의 걸작들을 기억하는 자라면, 이 유럽 여행 같은 우디 앨런의 이 영화들 속에서 무엇인가 허전함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 허전함은 항상 그의 농담이 숨기고 있었던 삶의 무게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 같은 것일 것이다. 그래서, 브르고뉴 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롤랑 퀴오 (Roland Quillot)우디앨런의 철학(Philosophie de Woody Allen)”, 영어권에서 나온 여러 문화 비평가와 철학자들이 쓴 우디앨런과 철학 (Woody Allen and Philosophy, edited by M.T. Conrad)”, 독일계 미국 철학자인 비토리오 회슬레 (Vittorio Hoesle)가 쓴 우디 앨런: 코믹한 것의 본성에 대한 에세이(Woody Allen : An essay of the nature of the comical)” (특히, 이 책은 우디앨런은 철학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다라는 도발적인 말로 시작한다)처럼 우디 앨런의 영화에 대한 철학적 글들은 적지 않았고, 그리고 질 들뢰즈가 자신의 한 글에서 자신도 우디앨런의 새로운 영화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처럼, 우디 앨런의 그 가볍지만 차가운 농담속에서 숨어있던 그 철학적 무게들은 그의 영화들의 의미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로마 위드 러브>에서 오랜만에 연기를 하는 우디 앨런의 모습은 반갑지만, 빈약한 몸매에 두꺼운 뿔떼 안경은 여전하지만, 그 차가운 유머가 사라진 나이든 우디 앨런을 보는 것은 그리 즐겁지 않다.

로마의 아름다운 풍경이 계속 지나가는 이 영화를 보며 지워지지 않는 것은, 결국 인간은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냉철하고 처절하게 독재정권을 비판하며 시를 토해 내던 투사 같던 젊은 시인 김지하가, 이제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서러움을 느끼며 자신의 늙음을 스스로 증명하며 이제는 완전히 다른 길로 가버린, 세상사는 게 다 그런 것이 아니냐는 말을 뇌까리는 듯한 늙은 시인 김지하를 보는 슬픔만큼이나, 자신의 서늘한 유머와 유럽 예술 콤플렉스를 이제는 잊고 이제 그냥 삶을 즐기라는 듯한 우디 앨런의 영화 속 웃음을 보는 것 또한 그렇게 즐거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간다면 다시 예전 그 느낌의 진짜 우디 앨런표 영화를 볼 수 있을까? 우디 앨런은 그저 힘없는 늙은 감독이 되어 버린 것일까?


홀리 모터스 - 영화라는 신비 혹은 신성함 images du cinema

                                                                            (이미지 출처 씨네 21)

오랫만에 장편 극영화로 돌아론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모터스>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대로, 영화에 관한 영화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는 영화가 처음 탄생했을 때 그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느끼던 영화라는 '신비'를 다시 말하고 싶은 영화인 것이다.이 영화는 영화사 초기의 인간의 행동을 단순하게 찍었던 에티엔-줄 마레의 영상들로 시작해서 이 영상들로 끝난다. 즉, 지금은 너무나 쉽게 보는, 너무나 당연하고 흔해빠진 영화가 사람들에게 주었던 그 신비를 카락스는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인류최초로 실제로 움직이는 것을 보여주던, 인간이 느끼던 그 시간이 이미지의 운동속에 시각적으로 드러났을 때 인간들이 느낀 그 신비가 사라진 현실속에서 그는 영화의 그 신비를 다시 말하여 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자신의 방의 벽을 열고 극장안으로 들어가는 레오스 카락스 감독 본인의 마법과 같은 행위는 마치 극장보다는 집에서 dvd로 영화를 즐기는 이 시대의 일상을 넘어서, 다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그 신비의 순간으로 다가서기 위함이고, 이 영화 전체가 파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파리는 바로 영화가 탄생한 곳이고, 그에게 영감을 주던 '파리라는 영화'에 대한 오마쥬이기도 하다. 그 영화자체로서의 파리라는 공간에서 드니 라방은 9번이나 다른 인물들을 연기하며, 파리를 곳곳을 다양한 영화로, 영화의 신비함이 성취되는 장소로서 만는 것이다. 레오스 카락스에게 영화라는 신비를 가장 잘 드러낸 감독은 장 콕토와 조르쥬 프란쥬로 보인다. 장 콕토가 그 영화의 신비를 초현실주의적 시로 만들려 한다면, 조르쥬 프란쥬는 그 신비를 이상한 공포로 만들려 한다. 그들이 되살리려는 영화의 신비는 홀리 모터스에서도 드러난다. 이 영화의 초현실주의적 분위기와 영화의 마지막의 가면과 영화중간중간에 드러난 신비한 공포는 이 두 영화감독에 대한 오마쥬이면서 영화가 탄생시켰던 그 신비를 다가가려는 레오스 카락스의 시도와 같다.



9번 째의 에피소드로 나오는 뮤지컬 장면은 아마도 파리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좀 더 다가올 것이다. 이 에피소드가 찍은 곳은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녔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지금은 닫혀있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리모델링중이서 과거의 영광이 다 사라져 버린 듯한 사마리탠 백화점안에서 찍혔다. 그리고 이 백화점의 옥상에서 밑에 보이는 다리는 바로 그 옆에 위치한 퐁네프 다리이다.이 쯤되면 우리는 왜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이 마지막 에피소드를 여기서 찍었는지 알 수 있다. 레오스 카락스의 미친 영화적 실험이었고, 그를 나락으로 빠뜨린 퐁네프의 연인의 그 기억들이 그를 다시 이 백화점으로 이끌었었는지도 모른다.그는 자신의 영감의 공간으로 로서 파리에서, 자신의 영화적 실험의 장소로서 퐁네프에서, 이제 다시 자신이 느꼈던 영화라는 황홀한 성스런 (Holy)신비를 다시 되살리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신비는 영화가 처음 탄생했을 때의 그 영화이미지들이 주던 신비로 돌아가는 것이다. 영화는 Holy Motors 라는 이름이 찍힌 주차장과 같은 신비로운 장소에 수많은 캐딜락이 있는 장소에서 끝이 난다. Holy Motors 가 영화관이라면, 각각의 캐딜락들은 수많은 감독들과 배우들에 찍혀 상영되기를 기다리는 영화들과 같이 보인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에 대한 찬가인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처음보았을 때 느꼈지만, 이젠 잊혀였던 그 신비를 다시 되살리며, 영화는 아직 살아있으며 다시 시작하려는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의 가능성에 대한 시적인 선언이 바로 홀리 모터스 인 것이다. 

장고, 분노의 추격자 - 뒤틀기의 쾌감 images du cinema

                                                                           (이미지 출처- 씨네21)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이상한 쾌감이 있다. 어쩌면 그것은 씨네필들이 더 느낄 수 있는 쾌감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뒤틀기에서 온다. 마치 실제 그 사람보다,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한 성대모사 나 모창에서 느낄 수 있는 이상한 쾌감과 같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것이 영화의 뒤틀기에 적용된다면, 그 사람이 누군지는 씨네필들이 더 잘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뒤틀기의 대가이다. 그를 뛰어난 작가로 알리기 되었던 <펄프 픽션>의 영화의 내러티브에 대한 뒤틀기 였고, <킬빌>은 동 서양의 영화 장르를 혼합하여 장르의 뒤틀기를 보여주었다면, <바스타즈> 부터 그는 이제 이러한 자신의 뒤틀기의 스타일을 가다듬으며, 역사의 뒤틀기를 자신의 영화로 끌어들인다. <바스타즈>가 2차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완전히 자신의 역사 뒤틀기 속에서 히틀러에게 기관총을 갈겨되며, 그 역사 왜곡의 쾌감과 장르 뒤틀기의 쾌감을 섞는다.
<장고, 분노의 추격자> (이하 장고로 칭함)도 이러한 역사 뒤틀기의 맥락속에 있기에, <바스타즈>와 같은 자장속에 있는 영화인 것이다. 바스타즈는 2차대전을 배경으로 유럽으로 간 미국(군)인들이 주요한 인물들이라면, 장고는 미국에 온 유럽인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물론 이러한 장소적인 맥락은 크리스토퍼 왈츠의 뛰어난 역할 때문이겠지만, 이러한 맥락은 미국보다는 유럽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고, 이제 미국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고 있는 타란티노 자신의 감독으로서 정체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물론 장고가 색다른 것은 분명히 스파게티 웨스턴의 유명한 영화였던 장고의 이름과 그 주제곡을 그대로 쓰면서, (타란티노가 가장 좋아하는)스파게티 웨스턴의 대가인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기법을 사용하며, 흑인노예를 서부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세워버림으로써, 플랙스플로이테이션과 스파게티 웨스턴의 기묘한 조합이 된 영화가 된다. 그리고 영화는 갑자기 영화의 끝부분에 오우삼이 홍콩느와르의 피와 총알이 빗발치던 순간으로 다가간다. 뒤틀린 스파게티 웨스턴이 갑자기 홍콩느와르와 조인하는 또 하나의 미묘한 순간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뒤틀기의 중점은 역시 미국의 역사를 뒤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서부영화는 단순한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미국문화로서, 존 웨인으로 대표되는 정의의 카우보이의 이미지속의 선과 악의 대결속에서 선이 이기는 미국적 윤리가 완성되는 이미지로서 상징되기에, 공적으로는 사용되서는 안될 검둥이 (negro)라는 말이 쉴새 없이 반복되는 저급한 대화속에서 흑인 건맨이을 주인공으로서 만듦으로서 미국적 역사의 뒤틀기의 쾌감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마치 컨트리 음악이 미국 백인만의 음악 장르이듯, 백인건맨으로만 이루어지는 웨스턴에 흑인건맨이 등장하며, 미국이 잊고 싶은 역사인 흑인 노예의 잔혹사를 가지고 서부영화가 가지고 있는 백인신화의 허구적 윤리성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우연하게 미국 흑인 노예 해방의 대명상인 링컨에 관한 영화 두편이 개봉되었다. 하나는 링컨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역사적 링컨의 관점에 있는 스필버그의 <링컨>과 판타지 영화인 <링컨 뱀파이어 헌터>이다. 영화속에서 잊혀졌던 링컨이 너무나 다른 이 두영화에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은 미국의 흑인해방역사의 중요한 역사적 결과물로서 흑인 대통령 오바마를 향해 그가 흑인 링컨이 되길 바라는 헐리우드의 다시한번 지지선언 일 수 있다면, <장고>는 오바마 시대에 흑인건맨이 등장하는 새로운 웨스턴이 되는 것이다. 보수적인 미국인들에게 특히, 진짜 카우보이들이라고 생각하는 텍사스를 비롯한 남부지역에서, 오바마가 다시 재선되었을 때에 미국에서 독립하겠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오바마 정권은 이미 그들에게 뒤틀려진 미국의 받아들일 수 없는 역사라고 생각되어 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타란티노는 <장고>를 통해서 미국의 역사를 뒤틀어버림으로써 흑인 대통령으로서 시작되는 그들이 뒤틀려졌다고 생각하는 미국의 역사에 대해서 조소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인 불에 타고 있는 전형적인 미국 남부의 거대한 주택은 자신의 흑인건맨 처럼, 흑인 대통령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미국의 역사를 다시 보라는 그들에 대한 타란티노의 답변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영화와 철학에 대한 강의 images de la vie




영등포 신세계 백화점 문화 아카데미 에서 처음으로 대중을 상대로 영화와 철학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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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장인의 철학입문!, 영화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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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수아레 : 세계의 감독 - 우디 알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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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수아레: 세계의 감독 - 김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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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수아레: 세계의 감독 - 구로자와 아키라


좋은 강의란 있을까? monologue


유학시절 강의를 집중해서 여러시간동안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한국말로 해도 이해하기에 어려운 내용들이었기도 하고, 근본적으로 나의 부족한 불어실력이 문제기도 했겠지만, 내 스스로 강의에 대해서 신뢰하지 못하는 나의 자세에도 문제가 있었다. 학생의 관심과 흥미를 끄는 강의를 나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고, 학생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그저 복잡한 단어들로 지적 독백과 같은 강의를 하는 교수님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정말로 성실하게 열심히,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쉽게 설명하려는 (교수님들이 아닌) 강사분들이 있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기에, 항상 강의를 열심히 듣기 보다는 차라리 책을 열심히 보자는 결심만을 할 뿐이었다. 이런 나의 버릇은 유학중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강의에 집중하지 않으면, 진도가 어디까지 갔는지, 언제 시험을 보는지 정확하게 알기 쉽지 않았기에, 나름 강의에 집중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그래도 어느정도는 무슨 이야기를 교수님들이 하는 정도로 적응이 되었을때, 아무리 집중해도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아주 깐깐해 보이는 교수님의 강의가 있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어느 프랑스 친구에 이런 얘기를 했더니, 그 친구도 자신도 무슨 말을 그 교수님이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그의 말은 그는 말 그대로 자신이 준비해 온 강의를 그대로 암기 해서 읽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그의 강의는 프랑스 학생들도 이해할 수 없는 문어체 불어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나름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 교수님은 서구전통에 정확하게 맞는 강의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강의는 불어나 영어로 다 lecture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원래 '읽는다'는 뜻이고, 독일어의 강의에 해당하는 Vorlesung 역시 '앞에서 낭송하다, 읽는다'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 교수님은 진짜 강의를 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무지하게 지루한 강의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내 스스로 강의를 하고 있기에 좋은 강의란 무엇인지 스스로 계속 묻게 된다. 지루하지 않고, 흥미있으면서도 내용을 깊이있게 전달하는 강의가 강의하는 누구나에게 이상적인 강의이겠지만, 현실적으로 이러한 강의는 이뤄지기 어렵다. 물론 그러한 강의를 하도록 노력을 할뿐이지만 말이다. 



강의가 결국 '읽는다'라는 말과 연관되어진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닌지도 모른다. 내 자신 또한 내가 준비한 내용을 읽고 있는 것은 분명히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읽는다'는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읽는다'는 그 행위가 단지 입이 아니라 강의하는 자의 몸전체가 될때 달라지는 것이다. 즉, 강의는 몸으로 읽는 행위가 될 때, 강의는 퍼포먼스가 된다. 그래서 좋은 강의란 강의를 하는자의 몸의 퍼포먼스 와 청중으로서 강의를 듣는자의 몸이 일치되는 순간이 많아지는 공연이 될 때 일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은 자주 오지 않는다. 아무리 강의 준비를 철저히 하더라도,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열심히 집중하더라도, 마치 아름다운 공연이 자주 나타나지 않듯이 말이다. 마치 계시처럼 스치듯 사라지는 그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 강의 준비는 퍼포먼스를 준비하는 공연예술가처럼 몸의 느낌을 먼저 가다듬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의 순간 순간들이 몸의 퍼포먼스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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