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나날들 - 풍경의 미학과 정치학 사이



며칠전 한국에 맬릭감독이 올해 칸느 황금 종려상을 받은 트리 오브 라이프가 개봉되었지만, 맬릭 감독이 찍은 영화가 이 영화를 포함해 5개 밖에 안되지만, 한국에 정식으로 극장개봉한 것은 씬 레드 라인과 트리 오브 라이프 두 개일 뿐이다.
이런면에서 테렌스 맬릭이라는 이름조차 낯설던 90년대 초반 그의 천국의 나날들이 CIC 비디오로 출시 되었다는 사실은 놀랍기 조차 하다. 아마도 지금의 조지 클루니의 이미지처럼 잘생긴 매너좋은 중년 남성의 이미지로 인기를 끌던 리차드기어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영화의 비디오 출시를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출시가 되었다는데 이 영화는 보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이 영화를 비디오로 보았을 때, 이 영화 이후로 거의 20년을 운둔하던 테렌스 맬릭 감독이 왜 전설이 되었는지를 느낄수 있을 정도로 이 영화는 너무 아름답고도 또한 감정을 묘하게 이끌어 내는 대단한 영화였다. 하지만, 어떤 영화던지 비디오나 디브이디, 컴퓨터로 보았을 때 우리는 아직 그 영화를 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스스로 이제 막 씨네필의 발걸음을 시작할 무렵, 아직도 많은 영화들을 보지 못했던 나의 상태는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거의 20년이 지나서, 이제 수많은 영화를 보고, 이제는 영화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되어서, 파리의 한극장에서 천국의 나날을 다시 보았을때 나는 이 영화가 왜 아름다우면서도 또한 한편으로 꽤나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일단 그 커다란 스크린의 화면으로 보는 그 가을의 추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말이다.

영화의 시작은 엔리오 모리코네의 아름다운 음악 (이 음악은 지금도 칸느영화제에서 자주 사용된다)이 깔리면 20세기 초반의 미국의 처참한 노동에 시달리던 실제 노동자들의 사진으로 시작된다. 즉, 이 영화는 풍경의 영화이기 이전에 바로 노동자가 주인공인 영화인 것이다. 그리고 첫번째 시퀀스에서 제철공장에서 일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이 사진의 연장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공장을 떠나 그들은 추수밭으로 일을 하러 간다.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일하기에 그들의 상황은 나아 보이지만, 그들의 노동은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니 역설적으로 그 아름다운 풍경이 그들의 노동을 더욱 아이러니 하게 힘들게 만든다. 즉, 이 아름다운 풍경은 바로 노동자의 시선이 아니라, 바로 이 추수밭의 주인인 지주의 시선인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자연과의 거리감이다. 세잔느가 생 빅트와르 산의 의미를 농민들을 알 수 없다고 할때, 바로 그 농민들에게는 그 산의 풍경의 미학을 느낄 거리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 산의 그저 그들이 노동해야할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나날들에서의 이 아름다운 풍경을 느끼는 관객은 결국 지주의 시선으로 자연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관객은 그 주인공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즉, 바로 풍경을 다루는 맬릭의 방식이다. 이 풍경의 미학과 정치학을 아우르면서, 천국의 나날은 단지 아름다운 영화가 아니라, 노동자의 현실속에서 자연의 의미, 그 자연과 문화가 부딪히는 방식, 계급이 만나는 방식을 다룬다. 그래서, 지나친 형이상학의 과잉으로 인해, 맬릭의 사유를 담아내지 못하는 트리 오브 라이프의 이미지의 무능함보다는 소박하지만, 그 풍경속에서 인간, 자연, 정치를 관찰하는 천국의 나날들의 맬릭의 시선이 훨씬 아름답고 의미깊어 보이는 것이다.

by bergman | 2011/11/02 12:43 | images du cinema | 트랙백 | 덧글(0)

헤어조크 - 잃어버린꿈들의 동굴: 인간의 시간을 넘는 이마쥬의 힘



베르너 헤어조크의 신작인 잃어버린 꿈의 동굴 la grotte des reves perdus 1994년 남 프랑스 Chauvet 동굴 (이 동굴을 발견한 Chauvet 에서 온 이름이다.)에서 발견된 원시시대의 벽화에 대한 다큐멘타리이다. 만일 이 영화가 이 동굴의 벽화에 대한 역사적 고고학적 의미만을 다루었다면, 굳이 헤어조크가 감독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 그것은 바로 단지 신비로운 역사적 사실과 지식을 전달하는 다큐멘타리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 예술이 탄생한 그 잊혀진 순간에 대한, 더 정확히 말하면, 인류가 만든 최초의 이마쥬에 대한 그 신비로운 순간을 헤어조크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분명이 다큐멘타리이기에 여러 고고학자, 과학자, 예술사가 등의 인터뷰와 관점들이 이 벽화를 좀 더 깊게 이해하게 해준다. 하지만, 이 다큐멘타리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영화의 순간으로 변하는 것은 바로 아무런 커멘타리 없이 (이 영화의 보이스 오버는 또 다른 뛰어난 독일 감독 폴커 쇨렌도르프가 맡았다.) 약간의 음악속에 그 벽화의 모습들을 중간 샷 혹은 클로즈 업속에서 서서히 카메라가 이동할 때 있다. 마치 안드레이 루블레프의 마지막 장면에서 타르코프스키가 루블레프의 실제 이콘화를 근접화면속에 카메라를 움직이며, 그 이콘화가 표현하고자 하던 그 성스러움의 이마쥬를 찾는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그 순간이, 바로 헤어조크의 카메라 속에서 선사시대의 이 위대한 동굴벽화속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시간을 넘어서 존재하는 인간의 위대한 예술적 욕망의 드러남의 순간이라고 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인에게 전혀 공개되지 않은 이 벽화의 모습은, 인간의 문화, 인간의 언어가 탄생하기 이전에, 이 세계에 대한 표상으로서 그 인간의 원초적 에술로서의 이마쥬 속에서, 수많은 동물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특히, 이 벽화의 데생들은 지금의 예술사의 위대한 화가들의 데생에 비해도 떨어지지 않으며, 특히 동물들을 단순히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여러 동물들의 배치를 통해, 신비로운 미장센 또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감독으로서 헤어조크는 이 벽화속에서 오히려 인간 예술의 시작 뿐 아니라, 영화의 시작의 순간을 본다. 바로 이 동굴이라는 어두운 곳에서 펼쳐진 이 위대한 벽화를 카메라와 조명을 통해 보여줄 때, 그것은 빛과 어둠의 예술로서 존재하는 영화의 신비로운 시작을 은유하게 된다. 특히, 헤어조크는 다리가 4개가 아니라, 8개가 달린 모습으로 표현된, 말이나 들소의 벽화를 유심히 보여준다. , 이것은 바로 달리는 동물에 대한 원시 예술가의 표현일 수 있을 것인데, 바로 이 운동하는 이마쥬에 대한 표현에 관심이 바로 영화를 만들게 한 인간의 호기심이 것이다. 이렇게, 헤어조크는 이 3만년전 이상이 되는 이 쇼베 동굴 벽화속에서, 영화의 그 신비로운 원초적 시작점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다큐멘타리는 단지 이 동굴벽화에 대한 지식전달을 넘어서, 인간의 예술의 시작점과 그 시작점에서 19세기 후반이나 되서야 등장할 영화예술의 원초적 기원의 순간을 보여줌으로써, 언어보다 더 근본적이고, 인간을 매료시키는 이마쥬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영화가 되는 것이다.


by bergman | 2011/09/15 09:17 | images du cinema | 트랙백 | 덧글(0)

라스 폰 트리에 - 멜랑콜리아 : 종말론적 회화의 아름다움



멜랑콜리의 원래 희랍어적인 어원으로 보면 검은 담즙을 의미한다. 히포크라테스가 정의한 인간의 체질 기준의 하나에서 나온 말로 바로 이 흑담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우울한 성격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은 중세에 까지 들어와서, 멜랑콜리는 아주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16세기에 나온 뒤러의 그 유명한 판화, 멜랑콜리아 이러한 멜랑콜리에 대한 입장을 뒤집는다. 바로 홀로 깊이 사색하고 고민하는 듯한 이 판화속의 여인 (혹은 천사)의 모습은 예술가의 상징이 된다. 그 여인의 주변에는 인간의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사유를 돕는 여러 과학적, 수학적 도구들이 있지만, 그녀는 그것들을 배제한 체, 마치 이러한 인간의 사유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듯 느끼며, 인간이 도저히 예측할 수 없고, 신비로운 우주의 신비를 홀로 외롭게 사유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러한 모습은 특히, 낭만주의 시절에 더욱 찬양받았으며, 홀로 고독하게 항상 우울하게 보이는 천재적인 예술가의 감성은 바로 멜랑콜리라는 말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즉 멜랑콜리의 그 독특한 의미는 낭만주의를 통해서, 더욱 드러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명민하고 분석적인 모습이 아니라, 무엇인가 우울증에 빠져있는 듯한 현대적인 의미의 예술가의 모습은 이러한 낭만주의적 멜랑콜리와 연관되어져 있는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가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멜랑콜리아는 어떠한 병증이 아니라, 지구로 다가와 지구를 부서버리려 하는 어느 혹성의 이름인 것이다. 하지만, 이 혹성이 결국 지구를, 지구에서의 인간의 삶을 끝장내려는 순간이 점점 다가올 때 이 영화가 가지고 오는 그 종말론적 분위기는 바로 멜랑콜리아가 단지 혹성이 아니라, 시간의 끝에 인간의 삶을 점유하는 하나의 증후군으로서 결국 낭만주의적 맥락의 분위기를 이으면서, 모든 인간의 감정을 점유해 버리는 멜랑콜리를 만들어 낸다. 그의 전작이었던 안티크리스트가 보여주었는 인간과 자연, 남자와 여자의 상징을 통해 보여주었던 그 낭만주의적 분위기가 이 영화에서도 지속된다.




영화의 시작은 아름답다. 영화의 첫 부분은 영화가 결국 이야기를 하는 문학과 같은 장르가 아니라, 비쥬얼 이미지가 시작점일 말그대로, motion picture 움직이는 그림에서 시작될 수 밖에 없다는 라스 폰 트리에의 고백과 같다. 안티 크리스트의 첫장면이 헨델의 울게 하소서를 배경음악으로 해 놓고, 아주 느린 슬로우 모션의 화면속에서, 부부의 샤워실에서의 성행위와 아이의 죽음을 병치함으로서, 마치 아담과 이브의 인류 첫번째 범죄의 현장을 은유하는 듯, 쾌락과 고통의 순간을 미묘하게 연출하였던 것 처럼, 멜랑콜리아의 첫 장면은 특별한 이야기의 구조 없이, 영화속의 등장할 인물인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의 모습을 중심으로 초 슬로우 화면속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아름다움의 음악을 배경으로, 미술사의 중요한 회화들에 대한 인용을 통해서, 영화와 미술의 미묘한 만남을 보여준다. 또한 거의 움직임이 없는 듯한, 이 화면속에서, 그것은 부동으로서의 죽음과 생명()로서의 움직임이 독특하게 섞이면서, 죽음과 생명에 그 경계에서의 미학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 첫번째 시퀀스의 마지막 이마쥬는 바로 지구와 혹성 멜랑콜리아가 충돌하는 것이다. , 말하자면, 라스 폰 트리에 에게 이 영화에서의 내러티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는 처음부터 영화의 마지막 결론을 보여주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느린 화면속에서, 직접적으로 유일하게 등장하는 실제 그림은 바로, 브뤼겔의 눈속의 사냥꾼이 불타고 있는 이마쥬이다. 바로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와 거울에 등장했던 그 그림이다.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던, 안티크리스트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문장인 이 영화를 타르코프스키에게 바친다 라는 라스 폰 트리에 고백 (혹은 농담)이 여기서도 지속되는 것이다. , 라스 폰 트리에는 이 멜랑콜리아에 대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의 영감은 항상 타르코프스키에게서 오며, 멜랑콜리아를 찍으면서도, 솔라리스를 많이 보았다고 설명한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신이라는 그 초월적 존재로부터 오는 설명 불가능한 성스러움이 드러나는 그 시간을 잡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성스러움을 이마쥬로 드러내려 했던 그리스 정교의 이콘화의 전통을 영화 이마쥬속에서 새롭게 드러내려 하는 것이었다면, 라스 폰 트리에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이마쥬의 선정성과 세속신학을 통한 인간의 욕망속에서 예측없이 드러나는 이상한 기적의 순간(특히 브레이킹 더 웨이브스)을 드러내려 경향이 강한 것이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의 스타일이라면 (내 개인적으로 보이게 타르코프스키는 예술가가된 성직자라면, 라스 폰 트리에는 영화이마쥬의 힘을 나름 깨달은 팝 아티스트로 보인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그 성스러움이 다가오는 신비의 시간은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랑콜리아에서 라스폰 트리에가 타르코프키의 영화가 만난다면, 그것은 영화와 회화의 관계에 대한 관심속에서, 영화와 회화가 만나는 그 미묘한 지점을 라스 폰 트리에가 시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첫번째 시퀀스 이후로 영화는 회화적 이마쥬의 분위가 관계없이 진행된다. 물론, 방에 펼쳐져있던 기하학적 추상화 (몬드리안과 말레비치의 그림으로 보이는)의 화집들을 주인공 저스틴이 브뤼겔의 그림이나 상징주의, 낭만주의 그림의 화집들로 바꾸어 버리는 씬을 빼고 말이다.

영화는 두 자매의 이름을 가지고 두가지 챕터로 나누어 진다. 첫번째 챕터는 저스틴 이고, 두번째 챕터는 클레어 (샤를롯 갱스부르)이다. 첫번째 챕터는 저스틴의 결혼식 파티으로 이루어 지는데, 그녀는 점점 이유없는 우울증에 빠지면서 결혼을 거부하고, 결혼식은 올렸지만, 결국 취소하게 된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 챕터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보여주면, 성스러움이 빠진 그 어수선하 결혼식 속에서, 가족의 불화, 인간의 치졸함등을 드러내며, 결혼과 같은 인간의 제도나 그 제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인간의 삶의 부질없음을 조롱한다. 두번째 챕터는 자신이 동생인 저스틴을 위해서 정성껏 준비한 결혼식이 망가져서 실망한 클레어가, 이제 결혼식이 문제가 아니라, 지구의 종말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느끼며, 불안해 하는 내용들로 구성된다. 이 두 챕터속에서, 이 두 자매는 대립되게 된다. 자신의 결혼을 포기하고, 지구의 종말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근심없이 이 지구상의 생명이, 그 삶이 얼마나 부질없는 의미없는 것인가를 말하는 저스틴과 이미 결혼해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클레어가, 자신의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클레어의 모습은 완전히 대비된다. 이러한 종말론적 분위기는 영화 처음의 그 아름다운 회화적 화면과 만난다. 달빛에 자신의 옷을 벗고, 월광욕을 하는 저스틴의 모습은 마치 자연과 하나되려는, 그리고 우주의 원리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멜랑콜리적인 낭만주의 아티스트의 모습으로서 구현이 된다면, 죽음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아들의 생명과 미래를 걱정하는 클레어의 모습은 일상적인 현대인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 사이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종말론적 예언자가 되려한다. 하지만, 그는 차가운 우주의 원리속에서, 인간의 모든 가치를 그저 부인하려는 것 처럼 보인다. 바로 그 지점에서는 그 영화는 윤리를 결여한 그저 아름다움만 남은 이마쥬의 선정성의 영화가 된다. 이 지점이 타르코프스키와 라스 폰 트리에가 갈리는 지점이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의 마지막에서 이 지구의 마지막 시간에도 주인공은 죽은 나무에 물을 준다. 하지만, 멜랑콜리아는 우주의 원리를 그대로 받아들일 뿐, 시간의 끝앞에서 고통스럽거나 혹은 우울한 인간의 현실만이 남을 뿐이다.그래서 멜랑콜리아가 분명 아름다운 영화라 할 지라도, 타르코프스키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그의 고백은단지 농담이 될 뿐인 것이다.



by bergman | 2011/08/25 10:38 | images du cinema | 트랙백 | 덧글(0)

모네, 현대미술, 개념들.






 



파리에 온 관광객들이 그림에 관심이 있거나 없거나 반드시 방문하는 곳은 루브르 미술관과 오르세이 미술관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오르세이 미술관의 그림들을 더 좋아한다. 신화 나 도상학적 지식이 부족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루브르의 그림들보다 인상주의 그림들이 더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모네의 그림은 더 인기가 많다. 흔하게 달력에서도 본 듯한, 풍경을 통한 화사한 그의 그림들의 이마쥬가 주는 느낌 덕분일 것인데, 역설적으로 19세기 중반의 관객들은 모네의 그림을 아름답기는 커녕 이상한 그림으로 생각했다. 즉, 그 시대를 지배하던 신고전주의의 화풍이 진정한 그림으로 인정받던 시절에, 선이 흩어지고, 자연광을 사용하여 조명이 정리가 안되며. 이상주의적 자연이나 신화를 그리지 않고, 그저 일상적 풍경을 그리는 모네의 그림은 당연히 받아들여 지기 어려웠던 것이다. 즉, 현재의 관객들이 모네의 그림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미 그들의 시각이 인상주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문화화 되고, 훈련되어져있기 때문인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한 시대의 미학적 무의식 (물론 랑시에르는 이 용어를 미학적 레짐에만 사용했지만)이 관객에게 작동되었다고 할까?

결국 이러한 문제는 아름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된다. 21세기의 관객들도 19세기 후반의 인상주의나 20세기 초반의 입체파, 표현주의등의 그림에는 나름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지만, 그 이후의 나타나는 예술작품에 대해서는 그저 이상한 낯설음만을 느끼게 된다. 즉, 20세기 중반이후의 미술은 바로 이러한 아름다움의 기준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 시대의 예술가들은 당연히 그 전 시대의 예술적 아름다움의 기준에 도전한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의 미술은 더 나아가서 아름다움이라는 기준 자체를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마르셀 뒤샹을 아직도 넘어서기 힘든 것은,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혹은 예술이라는 권위주의의 도전, 미술관과 일상의 공간의 경계 허물기와 같은 그의 발상은 현대 미술의 단초가 되면서, 아름다움의 의미를 완전히 해체하는 지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21세기의 일상적 관객들은 현대미술의 일종의 거리감을 느낀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줄서 있는 루브르 미술관과 오르세이의 미술관의 모습과 관객이 별로 차지 않는 퐁피두 현대 미술관의 모습속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현대 미술은 관객과 소통하기 보다는 마치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처럼, 관객이 작품에 거리를 두고 생각하고, 미술이 말하는 개념을 관객의 작품을 느끼는 지각속에서 드러내게 하려한다. 그래서,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사라지고, 현대미술은 개념으로서의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작품을 20세기, 21세기의 관객들이 되서야 제대로 즐기듯, 20세기 중반 이후의 작품들은 22세기,23세기 관객들이 되서야 제대로 이해되어 질 수 있을까?

by bergman | 2011/08/25 09:57 | images de la pensee | 트랙백 | 덧글(0)

악마를 보았다 와 황해. 그 폭력성의 의미.


 

   지난 7월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 가 Jai rencontréle diable (악마를 만났.) 라는 불어제목으로 나홍진 감독의 황해가 The murderer 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에 개봉되었다. 전 세계의 대부분의 영화가 개봉되는 파리에, 그리고 그 수많은 블록 버스터의 전쟁이 벌어지는 이 파리의 극장가에 이 두 한국영화가 개봉된 것은 꽤나 의미있는 일이다. 그리고 두 영화 다 프랑스 비평계는꽤나 호의적이며, 한달이 지났지만, 지금도 몇몇 극장에서 계속 상영중이다.

 

   파리에서 한국영화를 본다는 기분은 새로운 느낌을 준다. , 파리라는 이 영화의 도시에서 전 세계 그 수많은 영화들과 한국영화를 어쩔 수 없이 비교하기 때문이. 많은 프랑스인들이 동의하는바 인데, 한국영화는 다른 나라의 영화들과 비교할 수 없는 에너지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장르에 따라 나오는 에너지라기 보다는, 마치 문화적으로 억압되었던 것들이 폭발하는, 이 조용한 유럽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그러한 에너지가 솟아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악마를 보았다에서의 최민식의 연기는 케이프 피어의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의 에너지에 맞먹고 있고, 황해에서의 자동차 추격신은 수백억을 들인 헐리우드 영화의 자동차 추격신의 에너지와 스피드와 비교될 수 있을정도로 대단하다. 그러나, 이러한 에너지는 한국의 영화의 폭력성과 연결된다. 그래서 한국 영화를 같이 본 프랑스 친구들의 질문은 하나같이 왜 이렇게 한국영화는 폭력적이냐는 것이다. 하지만,한국영화가 다른 나라의 영화에 비해서 더 폭력적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헐리우드 영화나 유럽영화속에서도 폭력적인 영화는 충분히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영화가 더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많은 폭력적인 영화들이 그 폭력을 가해하는 자의 입장에서 폭력을 보여줌으로써, 그 폭력이 중화되고, 관객이 쾌감을 느낄 수 있도록 카메라를 조절한다면 (예를 들면, 람보 같은 영화에서 람보가 수없이 많은 베트남 군인들을 죽이더라도, 피해자인 베트남 군인 금새 쁠랑안에서 사라지고,  카메라는 폭력의 가해자인 람보의 행위와 그의 육체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폭력은 중화되고, 관객은 주인공으로 몰입하게 된다.) 반면, 국 영화의 많은 장면들이 폭력을 행하는 가해자 뿐 아니라,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의 고통을 자주 보여줌으로써, 그 폭력은 다른 영화들보다 훨씬 강해진다. ,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의 모습이 더 자주 드러나기 때문인 것이다. 특히, 한국 영화에서의 이 폭력은 단순히 총기가 아닌, 망치, 도끼, 칼 등 좀 더 원초적인 도구를 통해, 피해자가 당하는 폭력이 더욱 강화된다. 문화적으로 한국 영화의 폭력성에 대해 가장 자주 할 수 있는 답변은 한국의 역사와 연결된 답변이다. 일제 식민지와 남북분단, 군사독재로 인한 그 억눌림과 문화적 표현의 자유에 대한 반발이 현재의 영화들의 폭력성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고 답변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도 그 폭력은 진행중이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 잘 보여주듯이, 80년대의 그 어두운 시절의 가해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피해자만 늘어나는 그 폭력의 일상화됨이 2011년 한국에는 아직도 계속되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폭력의 피해자로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살 수 밖에 없는 한국사회가 만들어 내는 그 폭력의 일상성이 유럽관객이 느끼는 그 폭력의 과도함을 한국관객에게는 그저 일상적 폭력으로 이해되어지는 증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폭력성 속에서, 폭력과 일상이 자꾸만 일치되어 가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는 것이다.


by bergman | 2011/08/19 23:24 | images du cinema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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