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금자씨 - 즐거운 죄의식 images du cinema


복수 씨리즈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은 그 마지막 답게 그 전작인복수는 나의 것올드보이의 많은 출연자들이 까메오나 조연급으로 출연하며, 당연히 복수라는 그 주제를 그대로 이어받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복수의 주인공이 여자이며, (사회적 계급)관계속에서 다루어진복수는 나의 것과 정신분석학 적이며, 내러티브의 구조의 힘으로 짜여져 있던올드보이와는 달리친절한 금자씨는 이데올로기 적이지도 않고, 내러티브의 힘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훨씬 영화는 차분해 보이기까지 하며, 가끔씩 등장하는 키치적이면서 유모스러운 장면들은 영화의 초반부에 금자가 입던 물방울 원피스 처럼, 촌스러우면서도 매력이있어 보인다.
이 영화는 인물 중심적인 영화이기에 (복수 3부작중 유일하게 주인공의 이름이 직접 말해지는 제목처럼) 클로즈 업이 유난히 많이 사용되며, 주인공 금자의 클로즈업 뿐만 아니라, 여러 조연들의 클로즈 업도 많이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자주 등장하는 3인칭 화자의 설명은 이 영화를 일종의 동화 혹은 라디오 드라마 처럼 만들면서, 영화의 시각적 효과와는 다른 묘한 맛(, 영화는 금자의 일인칭 시점이 아니라, 이 화자 때문에 자주 3인칭 시점과 일인칭 시점의 사이에 서있게 된다) 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영화의 끝부분에 나오는 3인칭 화자의그녀는 결국 그녀의 영혼을 속죄하지 못했다와 같은 지나치게 친절한 설명의 대사(하지만 이것이 또 하나의 농담일수 도 있지만) 는 마치 교육용 영화 같은 영화처럼 보이게 한다. 너무 친절한 찬욱씨.

이 영화는 하얀 두부로 시작해서, 하얀 케익 으로 끝난다. , 감옥을 나오던 첫 장면에서 두부를 거부하던 금자는 영화의 마지막에 하얀 눈이 오는 날 자신이 만든 하얀 케익에 얼굴을 묻어버린다. 이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자신 스스로에 의한 (남이 만든 두부가 아닌 자신이 만든 케익) 속죄의 의식일 수도 있지만, 그녀는 케익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자신을 감추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하얀 눈이 이 세상을 덮을 수는 있어도, 결국엔 깨끗하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자신의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금자를 도와주는 듯한 (하지만 결국 백 선생을 돕고 있는) 전도사가 등장하며, 유괴로 인해 죽은 아이의 부모 앞에서 금자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를 때 그들 부모의 탁상위에는 성경책이 놓여져 있었고, 금자의 담당형사는 찬송가를 흥얼거린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한다면, 기독교는 인간의 죄의식으로 흥행하는 종교이다. 과연 기독교가 인간의 죄의식만을 일으키는지,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인간의 죄의식을 언급하면서, 인간의 무기력함을 말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무기력함이 니체에게는 기독교의 가장 큰 비판이 되었으며, 그는 기독교의 무의미성을 말한다. 영화속에서도, 금자는 기독교를 자신의 모습을 허구적으로 위장하는데 사용할 뿐 의미를 갖지 못한다. 심지어, 북한 간첩 출신의 장기수에게 받은 법화경은 그녀의 복수의 수단이 되는 총을 만드는 설계도가 된다. , 그녀의 복수의 계획 앞에 종교는 무기력하다. 하지만, 그 종교보다 훨씬 더 근본에 서있는 죄의식 앞에서 금자 또한 벗어나지 못한다.
복수를 마치고 금자가 만나는 죽은 아이 원모의 영혼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고, 그녀의 입에 자갈을 물려버린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행복한 복수, 보람 있는 복수는 있을까?
복수를 통해,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순간, 죄의식은 우리의 내면깊숙이 에서 다시 드러난다. 왜냐하면, 죄의식은 바로 책임과 용서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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