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 그래픽 어페어 ― 관계의 시작과 그 종말 images du cinema


사람의 이름은 우리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여도 그 사람을 판단하게 만드는, 그 이름만이 주는 선입관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로 끝나는 일본식 이름을 가진 10대가 있다면, 그 이름은 그녀가 이미 40대의 아줌마 인 것처럼, 우리의 느낌들을 조작해낼 것이고, 김봉남이 앙드레 김으로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로 앙드레 김이 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전제 주의적 폭력이 넘쳐나는 그 경직된 군대라는 조직체에서 나의 쫄병으로 들어온 사단장과 이름이 똑같았던 그 녀석은 사단장의 그 존엄한 이름이 함부로 불린다는 주임상사의 충직한 배려아래 후방의 모부대로 전출되는 코메디까지 생기기도 했다.

영화의 제목도 종종 그러한 오해를 불려 일으키는 때가 있는데, “포르노 그래픽 어페어도 그런 영화다. “포르노 그래픽이라는 제목만 보고 이 영화를 에로영화 코너에 꽂아놓은 무지한 비디오 숍의 주인과 화끈한 영화를 기대하는 동네의 에로영화 팬들은 착각하고 있었겠지만, 이 영화가 오히려 차가운 영화일 줄은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포르노 그래픽 어페어라는 이 프랑스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우리 영화거짓말과 함께 성담론을 이끌었던 영화다. 거짓말이 육체를 통한 극한, 그리고 그 육체라는 한계에서 벌어지는 지독한 살(flesh)풀이 라면, “포르노 그래픽 어페어성적인관계가 아니라 성적인관계에 관한 영화이다. 거짓말의 주인공이 서로의 이름도 알고 있으며, 직업도 알고 있지만, 그들의 관계는 대화가 아닌 육체로만 이루어지고, 육체를 통한 서로의 인식한계에서 몸부림 친다면, “포르노 그래픽 어페어의 두 주인공은 영화가 끝날 때 까지 서로의 이름과 직업등 아무것도 모른체 헤어지며, 육체적 관계에서 시작하여, 그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해 가는 과정의 극복에서 부딪힌다. 이 둘의 한계는 오히려 육체가 아니라 (이둘은 육체적으로는 상당히 만족해 한다.) 서로를 어떻게 인식 하는가 이며, 서로간의 대화가 더욱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두 명의 남녀가 만난다. 이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이며, 단지 서로의 섹스 파트너가 되어 주기위해 만나는 것이다. 순간의 대화 후 그 둘은 호텔로 향하고, 매주 목요일 마다 그둘의 관계는 계속 된다. 그리고 이둘의 이런 만남은 섹스이후의 서로간의 대화로 이어지고, 그녀는 섹스이후에 행하여지는 남자와의 사심없는 대화에서 남다른 느낌을 가지며, 점점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러 던중 호텔 복도에서 쓰러진 한 노인을 병원에 데려다 주고, 그의 부인을 만난후 사랑이라는, 그리고 삶의 짧고 허무한 그 의미들을 느낀 그녀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의 고백에 남자는 눈물을 터뜨리고, 감동하지만, 자신의 직업을 알면 그녀가 떠날 거라는, 서로에 대해 더욱 잘 알아 갈수록 우리는 결국 헤어질 것이라는 그는 이제 헤어질 것을 그녀에게 요구한다. 결국 그들은 헤어지고, 이름도 모르고, 누구인지 모르는 말 그대로 육체의 증거와 사랑의 느낌을 간직 한 채 그둘은 헤어진다. 시간이 꽤 지난후 우연히 멀리서 그를 보게 된 그녀는 그를 지켜보지만 아는 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그둘의 관계는 끝나는 것이다.

그녀(elle)와 그(il)의 인터뷰로 시작되어, 인터뷰로 끝나는 이 영화는 원래의 불어 영화제목처럼 affair가 아닌 une liaison, 즉 남녀간의 관계란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묻는다. 기존의 영화 속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남녀간의 사랑의 감정이 섹스로 이어지는 수순을 따르는 것에 반대로 섹스로 시작하여 사랑의 감정이 나타나는 구조를 택한다. 쾌락만을 위한 섹스, 자신만을 위한 관계에서 서로를 인식해 나가는 과정으로서의 관계이며, 이러한 그들의 이해방식을 감독은 독특하게 풀어나간다.

헐리우드나 동양의 감독의 의미가 단지 지시자 혹은 총괄자등의 뜻이 강하다면 프랑스어로 감독은 realisateur로 표기된다. 이건 곧 프랑스 영화의 작가주의 정신 즉, 단순히 영화를 찍어나가는 감독이 아니라 마치 카메라로 글쓰기를 하듯 인문적 사고와 네러티브 구조, 사유하는 미장센을 만들어 내는 예술가로서, 작가로서의 감독의 위치를 말해 준다. 그러나 영화를 이루는 바탕은 이마쥬이기에 영화는 흘러가는 시간으로 항상 부재하기에 머무는 시간으로서 존재하는 문학의 문자들과는 조우하지 못한다. 그래서 프랑스 영화의 전통은 흘러가는 문자들을 만들어 내고, 머무는 시간으로서의 이마쥬들 사이에서 배회한다. “문체란 언어적 표현 방식을 작가의 삶의 감정과 접합시키라는 요구”(바르트)라면, 작가로서의 감독의 스타일은 이마쥬와 시간의 표현 방식을 감독의 삶의 감정과 접합시키라는 요구로서 드러난다.

이러한 작가주의는 공동의 산물로서의 영화를 단지 엘리트주의적인 천재의 예술로 만드는 고전적 의미의 미학적 창조물로 타락 시킨다는 적지 않은 예술 사회학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영화의 남다른 아우라를 만드는 하나의 힘이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인물의 뛰어난 묘사(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받았다)와 섹스와 남녀간의 관계의 의미라는 네러티브 구조의 문학적 함의를 포괄하는 이 영화는 독자적인 색체로서 우리에게 관계란 무엇인지, 관계를가지는 것이 무엇인지, 관계를유지하는 것이란 무엇인지 주인공의 익명성을 통해 관객에게 되묻는다.


인터넷을 떠도는 사이버 포주들이 판을 친다.
자신의 나이, 수입, 학력, 외모를 입력하면, 그에 맞는 짝을 지어주는 너무나 편한 이 세상의 관계 속에서, 이미 남녀간의 관계란 우리가 너무 흔히 느끼듯 거래로 추락하며, 이것은 합법화된 또 하나의 매춘인지도 모른다. 징그럽게도 복잡한 삶은 항상 우리를 누르지만, 그 속에서 힘들게 만나는 우리들의 소중한 과거로서 남는 그 관계들의 소중함은 이미 부재하는 것이다.
육체에서 시작하던, 감정에서 시작하던 서로를 인식할 수록 밀어내듯 멀어지는 우리 삶의 복잡성속에 드러나는 우리들의 관계의 현현이 우리에겐 아직도 의미가 있을까?
두려운 것은 관계가 아니라, 너를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타자와의 관계를 낯설하는 우리자신들의 초라한 자화상이다.


덧글

  • 조제 2015/05/17 00:32 # 삭제 답글

    방금 영화 보고 이 리뷰를 읽으니 정말 좋네요. 글 아주 잘쓰시는 것 같습니다.
  • bergman 2015/05/17 01:56 # 답글

    감사합니다~벌써 15 년전에 쓴글이고~이 블로그에 옮겨놓은지도 8년이 다되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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