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폰 트리에 - 멜랑콜리아 : 종말론적 회화의 아름다움 images du cinema



멜랑콜리의 원래 희랍어적인 어원으로 보면 검은 담즙을 의미한다. 히포크라테스가 정의한 인간의 체질 기준의 하나에서 나온 말로 바로 이 흑담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우울한 성격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은 중세에 까지 들어와서, 멜랑콜리는 아주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16세기에 나온 뒤러의 그 유명한 판화, 멜랑콜리아 이러한 멜랑콜리에 대한 입장을 뒤집는다. 바로 홀로 깊이 사색하고 고민하는 듯한 이 판화속의 여인 (혹은 천사)의 모습은 예술가의 상징이 된다. 그 여인의 주변에는 인간의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사유를 돕는 여러 과학적, 수학적 도구들이 있지만, 그녀는 그것들을 배제한 체, 마치 이러한 인간의 사유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듯 느끼며, 인간이 도저히 예측할 수 없고, 신비로운 우주의 신비를 홀로 외롭게 사유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러한 모습은 특히, 낭만주의 시절에 더욱 찬양받았으며, 홀로 고독하게 항상 우울하게 보이는 천재적인 예술가의 감성은 바로 멜랑콜리라는 말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즉 멜랑콜리의 그 독특한 의미는 낭만주의를 통해서, 더욱 드러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명민하고 분석적인 모습이 아니라, 무엇인가 우울증에 빠져있는 듯한 현대적인 의미의 예술가의 모습은 이러한 낭만주의적 멜랑콜리와 연관되어져 있는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가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멜랑콜리아는 어떠한 병증이 아니라, 지구로 다가와 지구를 부서버리려 하는 어느 혹성의 이름인 것이다. 하지만, 이 혹성이 결국 지구를, 지구에서의 인간의 삶을 끝장내려는 순간이 점점 다가올 때 이 영화가 가지고 오는 그 종말론적 분위기는 바로 멜랑콜리아가 단지 혹성이 아니라, 시간의 끝에 인간의 삶을 점유하는 하나의 증후군으로서 결국 낭만주의적 맥락의 분위기를 이으면서, 모든 인간의 감정을 점유해 버리는 멜랑콜리를 만들어 낸다. 그의 전작이었던 안티크리스트가 보여주었는 인간과 자연, 남자와 여자의 상징을 통해 보여주었던 그 낭만주의적 분위기가 이 영화에서도 지속된다.




영화의 시작은 아름답다. 영화의 첫 부분은 영화가 결국 이야기를 하는 문학과 같은 장르가 아니라, 비쥬얼 이미지가 시작점일 말그대로, motion picture 움직이는 그림에서 시작될 수 밖에 없다는 라스 폰 트리에의 고백과 같다. 안티 크리스트의 첫장면이 헨델의 울게 하소서를 배경음악으로 해 놓고, 아주 느린 슬로우 모션의 화면속에서, 부부의 샤워실에서의 성행위와 아이의 죽음을 병치함으로서, 마치 아담과 이브의 인류 첫번째 범죄의 현장을 은유하는 듯, 쾌락과 고통의 순간을 미묘하게 연출하였던 것 처럼, 멜랑콜리아의 첫 장면은 특별한 이야기의 구조 없이, 영화속의 등장할 인물인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의 모습을 중심으로 초 슬로우 화면속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아름다움의 음악을 배경으로, 미술사의 중요한 회화들에 대한 인용을 통해서, 영화와 미술의 미묘한 만남을 보여준다. 또한 거의 움직임이 없는 듯한, 이 화면속에서, 그것은 부동으로서의 죽음과 생명()로서의 움직임이 독특하게 섞이면서, 죽음과 생명에 그 경계에서의 미학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 첫번째 시퀀스의 마지막 이마쥬는 바로 지구와 혹성 멜랑콜리아가 충돌하는 것이다. , 말하자면, 라스 폰 트리에 에게 이 영화에서의 내러티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는 처음부터 영화의 마지막 결론을 보여주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느린 화면속에서, 직접적으로 유일하게 등장하는 실제 그림은 바로, 브뤼겔의 눈속의 사냥꾼이 불타고 있는 이마쥬이다. 바로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와 거울에 등장했던 그 그림이다.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던, 안티크리스트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문장인 이 영화를 타르코프스키에게 바친다 라는 라스 폰 트리에 고백 (혹은 농담)이 여기서도 지속되는 것이다. , 라스 폰 트리에는 이 멜랑콜리아에 대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의 영감은 항상 타르코프스키에게서 오며, 멜랑콜리아를 찍으면서도, 솔라리스를 많이 보았다고 설명한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신이라는 그 초월적 존재로부터 오는 설명 불가능한 성스러움이 드러나는 그 시간을 잡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성스러움을 이마쥬로 드러내려 했던 그리스 정교의 이콘화의 전통을 영화 이마쥬속에서 새롭게 드러내려 하는 것이었다면, 라스 폰 트리에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이마쥬의 선정성과 세속신학을 통한 인간의 욕망속에서 예측없이 드러나는 이상한 기적의 순간(특히 브레이킹 더 웨이브스)을 드러내려 경향이 강한 것이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의 스타일이라면 (내 개인적으로 보이게 타르코프스키는 예술가가된 성직자라면, 라스 폰 트리에는 영화이마쥬의 힘을 나름 깨달은 팝 아티스트로 보인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그 성스러움이 다가오는 신비의 시간은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랑콜리아에서 라스폰 트리에가 타르코프키의 영화가 만난다면, 그것은 영화와 회화의 관계에 대한 관심속에서, 영화와 회화가 만나는 그 미묘한 지점을 라스 폰 트리에가 시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첫번째 시퀀스 이후로 영화는 회화적 이마쥬의 분위가 관계없이 진행된다. 물론, 방에 펼쳐져있던 기하학적 추상화 (몬드리안과 말레비치의 그림으로 보이는)의 화집들을 주인공 저스틴이 브뤼겔의 그림이나 상징주의, 낭만주의 그림의 화집들로 바꾸어 버리는 씬을 빼고 말이다.

영화는 두 자매의 이름을 가지고 두가지 챕터로 나누어 진다. 첫번째 챕터는 저스틴 이고, 두번째 챕터는 클레어 (샤를롯 갱스부르)이다. 첫번째 챕터는 저스틴의 결혼식 파티으로 이루어 지는데, 그녀는 점점 이유없는 우울증에 빠지면서 결혼을 거부하고, 결혼식은 올렸지만, 결국 취소하게 된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 챕터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보여주면, 성스러움이 빠진 그 어수선하 결혼식 속에서, 가족의 불화, 인간의 치졸함등을 드러내며, 결혼과 같은 인간의 제도나 그 제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인간의 삶의 부질없음을 조롱한다. 두번째 챕터는 자신이 동생인 저스틴을 위해서 정성껏 준비한 결혼식이 망가져서 실망한 클레어가, 이제 결혼식이 문제가 아니라, 지구의 종말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느끼며, 불안해 하는 내용들로 구성된다. 이 두 챕터속에서, 이 두 자매는 대립되게 된다. 자신의 결혼을 포기하고, 지구의 종말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근심없이 이 지구상의 생명이, 그 삶이 얼마나 부질없는 의미없는 것인가를 말하는 저스틴과 이미 결혼해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클레어가, 자신의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클레어의 모습은 완전히 대비된다. 이러한 종말론적 분위기는 영화 처음의 그 아름다운 회화적 화면과 만난다. 달빛에 자신의 옷을 벗고, 월광욕을 하는 저스틴의 모습은 마치 자연과 하나되려는, 그리고 우주의 원리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멜랑콜리적인 낭만주의 아티스트의 모습으로서 구현이 된다면, 죽음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아들의 생명과 미래를 걱정하는 클레어의 모습은 일상적인 현대인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 사이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종말론적 예언자가 되려한다. 하지만, 그는 차가운 우주의 원리속에서, 인간의 모든 가치를 그저 부인하려는 것 처럼 보인다. 바로 그 지점에서는 그 영화는 윤리를 결여한 그저 아름다움만 남은 이마쥬의 선정성의 영화가 된다. 이 지점이 타르코프스키와 라스 폰 트리에가 갈리는 지점이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의 마지막에서 이 지구의 마지막 시간에도 주인공은 죽은 나무에 물을 준다. 하지만, 멜랑콜리아는 우주의 원리를 그대로 받아들일 뿐, 시간의 끝앞에서 고통스럽거나 혹은 우울한 인간의 현실만이 남을 뿐이다.그래서 멜랑콜리아가 분명 아름다운 영화라 할 지라도, 타르코프스키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그의 고백은단지 농담이 될 뿐인 것이다.




덧글

  • Elevation 2012/05/19 19:54 # 삭제 답글

    공감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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