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 두 개의 욕망 images du cinema

                                                                        (이미지출처 씨네21)




정지우 감독은 그 이전 영화에서 처럼 계속 사랑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한국감독중에 그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허진호 감독 또한 사랑이야기를 계속 한다. 하지만, 허진호 감독의 영화가 사랑의 이야기를 오즈의 스타일을 따라가려는 강박증속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의 도착을 자꾸 감정의 환타지로서, 혹은 추억이라는 낭만으로 메꾸어 가려 한다면, 정지우 감독의 사랑이야기는 사랑이 만들어 놓은 감정의 잉여와 그 스산함을 훨씬 세밀하게 그린다. 그러니까 정지우 감독의 영화가 사랑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훨씬 뛰어나다고 말하기보다는,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면에 깔린 그 욕망과 뒤틀림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고귀한 이름은 결국 욕망을 숨긴 도착이라는 사실을 훨씬 잘 말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적요의 은교에 대한 감정이 사랑인지, 젊은 (혹은 어린) 여자(의 몸에) 대한 욕망인지 구분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의미한 일인 것이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역시 왜 나이든 배우들을 놔두고, 굳이 젊은 배우인 박해일을 분장시켜서 이적요의 역할을 맡겼냐는 것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늙은 육체라고 해서 젊은 욕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니냐는 점에서, 실제로 늙은 배우 보다는, 실제로 그 속이 젊은 배우를 늙게 분장하는 것이 더 나을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늙은 분장을 한 젊은 배우 박해일이라는 이중성 처럼, 이적요는 그와 같은 이중성에 빠져 있다. 이 영화가 가진 슬픔은 거기에서 온다. 끊없는 욕망을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의 육체의 한계.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이적요는 위대한 시인이고, 지식인이기에 그에게는 욕망을 눌러야 하는, 드러내 서는 안되는 사회적 시스템과 강박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씨네 21)


위의 중간 롱샷으로 보여지는 장면에서 보듯, 책을 둘러쌓여 그것에 눌린 듯한 이적요의 모습은 지적 욕구와 그것의 과시라는 지식인의 욕망과 어두운 그리 크지 않은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 한그루는 자신의 세계 밖으로 나가기 힘든, 자신의 신체적 욕망의 제어로서 상징된다. 이적요의 제자 서지우 또한 욕망덩어리이다. 그는 자신의 스승 (하지만 스승 이적요는 인정하지 않은)을 따라다니며 그의 분신이 되려고 한다. 그의 스승에 대한 존경은 그저 그처럼 되고 싶은 욕망, 하지만 될 수 없는 그의 문학적 능력에 부족에 나오는 균열적 감정으로서의 권력욕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은교와 성관계를 맺을 때 그가 욕망한 것은 은교의 육체가 아니었다. 스승의 욕망의 대상을 자신이 점유함으로써 스승의 자리에 있고 싶은 것이다. 영화의 광고 카피 처럼, 시인과 제자, 열일곱 소녀 서로를 탐하다 는 분명 잘못된 카피인 것이다. 제자가 탐한 것은 스승 이 (혹은 의 자리) 였던 것이다. 스승의 문학적 권력을 자신이 가질 수 없음을 깨달은 서지우가 은교를 탐할 때 그것을 몰래 지켜보는 이적요가 자신의 질투심 때문에 서지우를 살해하려 할 때, 오히려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애초부터 그들은 스승과 제자가 아니였던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스승과 제자, 늙은 시인과 어린 여고생의 사랑 관계는 다 깨진다. 영화 마지막 후반부 대학생이 된 듯한 은교가 자신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그 소설을 다시 읽고 그 소설이 서지우의 것이 아니라 이적요의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은 자신과 이적요만이 느꼈을 법한 감정을 서지우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였다. 그녀가 기뻐하는 것은 자신이 예술적 표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 표현의 내부에 이적요의 욕망이 드려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과거가 되었을 때 아름다워 보인다.

어쩌면 영화는 여기서 끝냈어야 한다. 이제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집에서 수많은 소주병이 놓여있는 이적요를 은교가 찾아가는 장면이 굳이 있었야 했을까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정지우 감독은 이들의 사랑을 이상화 하려고 들지 않은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성간의 사랑이 성적욕망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에서는 불가능 하지만, 그 사랑이 과거가 되었을 때, 그때의 성적욕망은 탈각되고 숭고화 된다. 정지우 감독은 그 사랑의 감정과 성적욕망의 사이에서 흔들거리는 이적요의 늙은 육체에서 그저 시라는 위대한 예술로서도 지워지지 않는 위태로움의 감정을 세밀하고도 은밀하고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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