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이미지들과 깨어남의 이미지들 사이 : 영화 이미지의 가능성 images de la pensee

                                                               
                                    멜리에스 <달나라 여행 (1905)> - 내러티브를 가진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점



<인문예술연구소 웹진의 요청으로 기고한 글입니다>


 

서구의 역사는 여러가지 시선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중요한 역사는 언어와 이미지간의 투쟁의 역사일 것이다. 서구의주류적 사유는 항상 언어적인 입장을 옹호해 왔다. (물론 <파이드로스>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구술언어에 대한 옹호와 문자언어에 대한 혐오로부터 데리다의 문자-글쓰기의 철학에 이르기 까지 구술언어와 문자언어의 투쟁 역시 서구 사유에 있어서 중요한 맥락을 지니고 있지만말이다.) 예를 들면, 미술사는 단순한 이미지의 역사가 아니라이미지가 어떻게 언어-문학적 전통에서 벗어나 이미지 자체로 되어가는지에 대한 역사이다. 고전적 회화는 항상 스토리를 가지는 신화, 성화, 역사화라는 틀에서만 그려졌다. 다시 말하면, 이미지가 철저하게 스토리적 이해라는 언어적 환원의 지향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18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본격적인 회화의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던 풍경화는 이런 면에서 끝없이 보수적인 비평가나 회화의 권력자들에게비판받게 된다. 왜냐하면 풍경화는 스토리를 벗어나 드디어 이미지가 이미지로서 이해되는 지점에서 등장하는회화 장르이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위대한 시인 보들레르가 그의 살롱비평에서 풍경화가들을 지지했던 것은아마도 언어를 넘어선 새로운 이미지 (혹은 언어를 넘어선 언어로서의 이미지)로서 등장하는 풍경화의 모더니티를 지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적회화의 끝에 추상화가 있다면 (특히 말레비치의 회화), 추상화는더 이상 언어로서 쉽게 환원될 수 없는 이미지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미지가언어에 대해 벗어나기 시작할 무렵 19세기 후반 영화가 탄생한다. 초창기영화는 말 그대로 이미지 그 자체였다. 항구로 들어오는 사람들, 역으로들어오는 기차들 등등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을 이미지로, 그것도 움직이는 이미지로서 그대로 복제하여관객들에게 충격을 주는 순간, 모던예술이 추구하던 리얼리즘을 기계적으로 완성하며, 이미지는 드디어 이미지 그 자체로 존재하기 시작한 역사적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추상화라는 이미지의 끝을 본 예술가들은 불안해 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이미지가 주는 즉물성이라는 폭력성에 대한 불안인지도 모른다. 이런면에서 이미지 자체를 다시 언어로서 철저하게 환원시키는 개념미술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미지로서 보여지는것 자체보다는 언어로서 그 이미지를 설명하는 개념이 먼저 존재하는 개념미술이 현대미술의 가장 강력한 시작점이 된다는 사실은 언어와 이미지의 투쟁이다시 시작된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이미지를 어떻게 언어와 함께 공존시킬 것인가라는 고민들, 다른 말로하면 이미지와 언어간의 상호적 효과에 대한 고민들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이미지로서 시작된 영화가 내러티브(언어)를 끌어들이기 시작한 것은 상업적인 이유가 더 중요했다. 움직이는이미지 그 자체로서 존재했던 초창기 영화가 주었던 충격과 흥미로움에 더 이상 관객들은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에드윈 포터나 멜리에스로부터 시작되는 스토리로 구성되는 영화의 이미지들은 랑시에르의 말처럼 영화를 역설적인 이미지들로 만든다. 고전적 내러티브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미술의 역사와는 달리, 이미지자체로 시작했던 영화의 역사는 고전적 내러티브를 어떻게 영화이미지를 통해 구성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대량복제로서 영화를 문화산업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비판적 시선을 취했던 아도르노의 입장에서 본다면, 영화가 이미지의 실험을 포기하고 내러티브를 가지게 되는 것은 그러한 문화산업으로서 대중기만의 길로 가기 위한시작점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도르노와 달리 영화를옹호하는 입장에 섰던 벤야민의 시선은 다르다. 서구의 역사를 보면, 서구의하층계급까지 대부분이 문자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20세기나 되어서야 가능했던 일이다. 이런 면에서 벤야민은 영화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본다. 문자를모르는 하층계급에게 몽타쥬 기법을 통한 이미지의 충격을 통해, 새롭게 그들을 일깨울 수 있으며, 문학적 사회 리얼리즘이 영화를 통해 그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사유했던 것이다. 하지만, 벤야민의 이러한 낙관적 전망은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21세기에 문화산업으로서의 영화는 더욱 더 강화되고 있으며, 영화는그저 상품으로서만 점점 더 간주되어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암살 (이미지 출처 ohmynews.com)




21세기의 대한민국의상황에서도 그러한 측면은 그리 달라져 보이지 않는다. 2015년 한국의 영화관람객수는 총 2 1728 8892명이었다. 인구비율로 하자면 대략 1인당4.3 회 정도 극장을 찾은 것이며, 이것은 세계최고 수준이다. 독서에 집중하는 한국인들은 줄고 있지만, 영화관객은 더 늘고 있다는사실은 이미지로 24시간 세상을 바라보는 스마트 폰 시대에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생각해 볼 것인가? 단순히 한국영화의 우수함과한국영화시장의 발전으로 볼 것인가?


미국의 영화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한 때는 바로 1930년대 경제공황 때 였다.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 (1985)>가 잘 보여주듯이 현실의고통과 괴로움을 잊기 위해 하층계급의 미국인들은 극장으로 향했고, 당시 영화들은 주로 환타지물, 달콤한 연애물이 주를 이루었다. , 영화는 현실을 망각하기 위한 마취제였던 것이다. 아마도 한국의 관객들로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청년실업과 빈부차가 넘쳐나는 헬조선이라고 불리우는 한국의 힘든 경제적, 정치적 상황속에서, 갈 곳 잃은 이들은 그렇게 극장으로 들어가 잠시라도고단한 현실을 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이 새로운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들이 보았던 적지 않은 영화들이 오히려 현실을 망각하기 위한 영화이기 보다는 오히려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였다는 것이다. 2015년의 천만이 넘은 대표적인 흥행작인 <암살> <베테랑>은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너무나 당연하게도 친일매국노들의 역사청산과 재벌개혁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이 영화관객을끌어 모은 것이 아닌가? 기껏해야 팝콘을 씹어대며 2시간정도를 보내는 하찮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들은 재창조될 수 있지 않을까? <암살>의 흥행에 불안해 하며 <암살>을 역사 왜곡이라고 폄하한 동아일보 논설위원의 컬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영화들에대한 관객들의 열망은 어떻게 현실화되어 질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거기에는 끊임없는 담론이 필요하다. 아직까지 유일하게 영화에 대한 진지한 담론을 만들어 내고 있는 <시네21>같은 잡지를 제외하고는 이제 그 어떤 매체도 영화에 대한 담론을 보여주지 않는다. <암살> <베테랑>에 대한 관객들의 환호가 단지 현실에 대한 일시적 대리만족이 아니라, 새로운깨어남의 이미지의 가능성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면 혹은 될 수 있다면 그 자리에는 활발한 담론이 필요한 것이다. 마치나의 가장 작은 습관들이 나의 건강을 망치는 원인이 되듯, 가장 하찮아 보이는 영화의 이미지들이야 말로이 시대를 바꿀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계기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진지한 담론들은 그 가능성의 계기에 대한 촉발점이 되지 않을까?벤야민이 영화에 대해 가졌던 그 기대와 가능성은 아직 한국땅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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