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쓴 글의 힘 images de la pensee




작년 2학기에 학교의 교양필수로 정해져 있는 글쓰기 강의를 맡게 되었다. 고등학교때 까지 주입식 교육으로만 지내오다가 이제 대학에 갓 입학한 1학년 학생들에게 자유로운 인문학적 사고와 표현을키워준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강의였다. 하지만, 학기 시작 전 이뤄졌던워크숍에서 적지 않은 기존의 교수들이 해주는 이야기들은 가장 어려운 강의라는 경험담들이었다. 글쓰기의 가장기본적인 기반은 수많은 독서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한 학기라는 짧은 기간 속에서 그러한 기반을 만들어내기가어려울 뿐 만 아니라, 특히 글을 잘 생산해 낼 수 있는 글쓰기의 테크닉을 전달해야 할 것인지, 단순히 글을 잘 쓰기보다는 글을 쓰는 것의 의미와 어떻게 글을 고민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강조점을 둘 것인지,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하는 강의였기 때문이다. 내 자신 또한 학위논문도 이미써봤고, 여러 다양한 글들도 써 봤지만, 글쓰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인질문과 강의를 많이 해보지 못했기에, 한 학기 내내 여러 가지 고민들을 가지고 학생들과의 글쓰기에 대한 소통을위해 많은 시도도 해보았던 강의이기도 했다.

미국의언어문화학자였던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는 아직인터넷과 SNS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시대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구술성 (orality)와 문자성(literacy) 사이의 언어 문화적 변증법을 가로지르면서, 20세기 후반 이후의 시대인 전자문화의 시대는 구술문화와 쓰기문화가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는 시대일 것이라고 정확히분석한다. 월터 옹은 문자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던 1차적 구술문화와는다르게 이미 문자를 통한 쓰기가 보편화되는 시대를 거친 전자시대는 2차적 구술문화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2차적 구술문화 시대는 전화,라디오, 텔레비전 등 구술과 연관이 깊은 기술적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통해서 형성되었으면서도, 그 존립을 쓰기와 인쇄에 힘입고 있는 구술성의 시대라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의글쓰기 과제들을 읽으면서, 이러한 월터 옹의 20세기 후반 이후의 2차적 구술문화에 대한 입장을 더욱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글쓰기의 훈련이안되었기 때문이겠지만, 나와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인터넷과 사이버 공간에 익숙한 문화에서 자란 학생들의 글은쓰기보다는 구술의 가까운 글이 더 많았다. 구술에 더 가까운 글이기 때문에 수준 이하였다라는 말을 하려는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21세기의 글쓰기의 또 다른 스타일이라고도볼 수 있는 지점도 있을 것이다. 이메일, SNS 등 기술적 커뮤니케이션매체의 시대에서 구술과 문자가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이 양자가 혼재되어 있는 21세기적 증상들을 학생들의글들을 통해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글쓰기의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은 단순히 새롭게 글쓰기가 정의되어야 한다는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 사유의 체계와 인간관계의방식들이 전자적 문화시대로 인해 완전히 바뀌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편지나 종이에 글을 쓰던 촉각적인 물질적 글쓰기에서, 사이버 공간이라는 환영적공간속에서의 탈촉각(脫觸覺)적 글쓰기로 변해간다는 지점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스마트폰이 가지고 있는 터치의 기능은 촉각적인 물질적 글쓰기가주던 감각을 전자적으로 대체하는 시도로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기술적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주는 편리함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인해 언제 어디서나소통이 가능한 효용성은 분명히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 탈촉각적글쓰기가 가져오는 소통의 유령성은, 다른 말로 하자면 존재하는 듯 하지만 부재하는 유령처럼, 현실공간의 상대방의 부재 속에서 접속이라는 기계적 소통을 통해 부재를 존재으로 대치하려는 마술적 혹은 기만적 시도는 오히려 인간의 관계를강화하기 보다는 너무나 가볍게 혹은 피상적으로 만드는 면이 강하다. <파이드로스>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구술성의 옹호와 문자에 대한 비판이 결국 플라톤의 글로 쓰여져 남겨진 역설처럼, 구술성과 문자성의 서로간의 우위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언제 어디서나 아무렇지도않게 내뱉게 되는 SNS 상의 구술적 글쓰기 들은 최소한의 생각을 하며 종이 위에 쓰여진 글쓰기와는 분명히다른 것이다.

오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가장 낯설었던 한국의 풍경중의하나는 카페에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도 말을 하기보다는 각자의 스마트폰의 SNS 소통에 집중하던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기술적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유령성이 어떻게 현실공간에서 인간의 관계들의 의미를 해체하는지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혼자 있어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기에, 인간관계가 더 넓어진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지만, 결국 그것은 홀로 있음에 대한 일시적 망각의 차원일 뿐이다. 그래서, 언제나 어디서나 접속, 소통가능한 이 시대는 인간을 더 외롭게 만들고, 오히려 고독함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게 만든다. 이러한 깊은 고민들 속에서, 내가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했던 것 중에 하나는글쓰기 연습을 반드시 펜이나 연필로 종이에 적어 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던 강의마지막 날 학생들에게 이 메일이나 SNS로 간단하고 편하게 e 카드나글을 보내기 보다는 가족들과 친한 친구들에게 짧게 라도 손으로 직접 쓴 카드나 편지를 보내기를 부탁했다. 좋은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종이 위에 자신의 필체로 쓰여진 글들이 얼마큼 아름다운 것인지, 그 쓰여진 글들의 물질성이 어떻게 자기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규정해 갈 수 있는지, 그리고그 손으로 쓰여진 글들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가 어떻게 의미 지어질 수 있는지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고 싶었다.

아무리정성스럽게 쓰여진 이 메일 이나 길게 쓰여져 보내진 SNS 일지라도 그것들을 다시 읽고 간직하는 경우는 찾아보기어렵다. 어쩌면 추억할 수 있고, 되새김질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만질 수 있다는 것이 손으로 쓰여진 글의 가장 다른 점일 것이다. 이 강의를 마치고 내 자신 또한 간직해두었던 예전의 받았던 카드와 편지를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나를 가장 가슴 아프게 했던 글은 재작년에 돌아가신아버지께서 유학시절에 보내주신 두 장의 연하장이었다. 컴퓨터 보다는 타자기에, 이메일 보다는 편지에 익숙하셨던 시대에 사셨던 분이시기에 아버지는 연하장을 보내신 것이었다. 어려운 집안의상황 때문에 유학생인 아들에게 전혀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없는 미안함, 그리고 나에 대한 그리움, 고마움 등이 그의 짧은 글속에서 지금도 움직이며 나의 눈물을 끌어내고 있었다.

언제나접속과 소통이 가능한 기술적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손으로 쓰여진 글의 힘이 주는 그 진정성은 전자적 매체가 가지는 용이함과 소통의 유령성을 언제나넘어선다. 그 짧은 아버지의 글 속에서 나는 아직도 그의 신체적 흔적을 느낀다.SNS의 차가움은 손으로 쓴 글의 뜨거움을 결코 넘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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