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 섭은낭>: 무협과 거울이라는 깊은 리얼리즘 images du cinema






아주 늦은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극장에는 관객들이 거의 없었다. 아마도설날연휴가 막 끝이 난 직 후 여서인지도 모른다. 극장의 독과점적인 배급의 폭력속에 <검사외전>이 대부분의 극장의 상영관을 차지하고 있기에 <자객 섭은낭>은 개봉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너무나 보기 힘들었다. 작년 칸느 영화제의 감독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시대의 가장 뛰어난 감독으로 여겨지는 후 샤오시엔의 영화를 그나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감사할 따름이었다. 재미있게도 그 자리에 있던 관객들의 절반 정도는 나이가 든 50대이상의 관객으로 보였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젊은 시절에 열광했던 호금전이나 장철의 무협영화를 기대하고왔을 것이다. 하지만, <자객 섭은낭>은 그 시작부터 그들의 기대를 배신한다. 과거의 TV 브라운관 같은 거의 정사각형의 1.37:1 의 비율의 화면으로영화의 대부분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호금전의 영화들은 화면 양쪽 날개가 긴 시네마스코프를 많이 사용했다. 그의영화 속에서 중국의 거대한 공간속에서 이루어지는 협객들의 무술은 마치 중국적 신화의 호쾌함을 만드는 듯 하다. 몽펠리에대학에서 공부할 때 영화와 댄스라는 이론 수업이 있었다. 내 예상과는 달리 이 수업에서 담당교수는 주로 중국의 쿵후 영화들 (성룡의영화들까지 포함해서)을 보여주며 그들의 영화속의 무술은 마치 일종의 댄스처럼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어쩌면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아 보인다. 중력을 무시하고 공중을 떠다니는무술은 무협의 세계를 하나의 공연적 스펙타클로 만드는지도 모른다. 시네마스코프 화면의 거대한 화면 속에서협객들은 서로 싸우는게 아니라 마치 조화를 이루며 도()의댄스를 실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37:1 을 화면을 사용한 것을 후 샤오 시엔은 자신이 추구하는리얼리즘 때문이라고 인터뷰에서말했다. 무협의 리얼리즘의 씬들의 연속 속에서 나이 든 관객들의 적지않은숫자가 영화 상영 중 극장을 나가 버렸다. 심지어 무술씬도 별로 없으며, 그들이 생각했던 호쾌한 무협의 신화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실망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후 샤오 시엔의 이러한 화면 비율은 영화 전체를규정한다. 신화로서의 무협영화가 아니라 리얼리즘으로서의 무협영화는 가능할 것인가?





양날개가 검게 지워진 작은 화면 비율 속에서 우리는 영화전체의 공간을 제대로 조망하지 못한다. 그 어둠에 묻힌 보이지 않는 스크린의 공간은 마치 누군가를 죽이러 들어온 보이지 않는 검은 옷의 자객의 공간이기도하겠지만 (이 영화의 일본 제목은 <검은 옷의 자객>이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숨겨야하는 섭은낭의 전계안을 향한내밀한 사랑의 감정의 공간이기도 할 것이다. (섭은낭의 섭() 속삭인다는 뜻이고 (이름의 성이지만) ()은 숨다라는 뜻이다. 섭은낭의 주관적 시점으로 커텐의 색깔이 미묘하게 드러나며, 전계안과그의 첩이 있는 장면을 몰래 보는 그 은밀함의 쇼트의 아름다움 !! )  또한 후 샤오시엔 특유의 롱 쇼트와 롱 테이크는 이 영화 속에서도 이어진다. 거울을 보고 춤을 추다가 죽은 난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섭은낭이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카메라는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는 약간씩 물러나며 그녀를 천천히 쳐다본다. 클로즈 업이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감정을 강요하기 보다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그 감정을 카메라로 감싸안으려는후 샤오 시엔의 미학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물론 뛰어난 색감과 미쟝 센을 통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모든 쇼트들의 아름다움, 수평과 수직을 오가는 유려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그의 방식은 후 샤오 시엔의 미학인 리얼리즘으로 귀결된다.










동시대의 또 다른 위대한 감독인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를 찍는 방식이 설명을 제거하고 마치 대상 자체나 상황을해부하듯 날카롭게 드러내는 차가운 리얼리즘의 영화라면, 후 샤오 시엔의 리얼리즘은 인간에 대한, 자신의 땅에 대한 애정이 스며들어 있는 깊은 리얼리즘의 영화이다. (심지어후 샤오 시엔은 <자객 섭은낭>에서 협객들간의대결장면의 적지 않은 쇼트를 숲으로 가리거나, 롱 쇼트로 보여주면서,그 대결이 가지는 긴장감을 해체하고 인간끼리의 부질없는 투쟁으로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미카엘 하네케의 영화에는 결국 해부 이후의 차가운 시신들이 남겨진다면, 후 샤오 시엔의 영화에는 그럼에도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아직도 따뜻한 피가 도는 인간들의 흔적이 남겨진다. 그래서 <자객 섭은낭>의 섭은낭도 차가운 피의 자객이 아니라 한명의 인간임을, 사랑을 해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인간으로서 남게 되는 것이다.

1.37:1 의 화면 비율이 우리를 압도하는 비율이 되는 지점은 중국북부의 몽골 근처에서 찍은 풍경이 드러날 때이다. 물을 강조하는 영화였던 <와호장룡>과는 달리, 이영화는 물이 나오는 장면은 단 한 쇼트에 불과하다. 양 날개보다는 위쪽을 강조하는 이 화면비율을 솟아오른산들과 골짜기의 아름다움 속에서 그 의미를 발휘한다. 그리고 자연광과 실제의 자연의 소리속에서 롱 쇼트로찍은 이 장면속에서 거대한 자연은 인간들의 모습을 초라하게 만들며 인간의 역사를 비웃는 듯 우리를 바라본다. 후샤오 시엔의 무협의 깊은 리얼리즘이 실현되는 순간인 것이다. (아름다운 실제 자연의 풍경의 쇼트 후에병풍에 그려진 인위적인 풍경의 쇼트로 이어지는 씬이 나온다. 이 방은 바로 흑마술을 부리는 도사의 방이다. , 그는 자연의 세계가 아닌 인간의 운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려는인공적 세계에 갇힌 자인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국 거울의 영화로 끝난다. 현실을 보여준다는 면에서리얼리즘은 결국 거울과 연결될 것이다. 앙드레 바쟁은 마치 거울처럼 현실을 그대로 비추는 현상학적 영화의꿈을 꾸었으며, 그가 지지했던 네오-리얼리즘은 그러한 거울의영화로서의 새로운 리얼리즘의 시작으로 극찬했다. 하지만, 그어떠한 거울도 현실을 그대로 보여줄 수 없다. 그 거울의 표면이 아무리 반들거리더라도 현실은 거울에갇혀버리고, 거울에 비치는 순간 현실은 두 개로 분열되기 때문이다. 자신의동족이 있어야 산다는 난조가 거울을 보고 죽은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결국 혼자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거울은현실을 비추지만 거울 속의 현실은 자신의 초라함과 외로움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섭은낭이택한 남자는 전계안이 아니라 거울 만드는 남자였다. 그는 거울을 만들기에 거울의 한계를 아는 자인 동시에, 둘이 있을 때 거울은 서로를 발견하고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는 삶의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아는 자인 것이다.


거울 만드는 남자는 후 샤오 시엔 자신인지도 모른다. 차가운 리얼리즘이아니라 영화라는 거울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그를, 그녀를, 우리를, 그들을 발견하는 깊은 리얼리즘의 작가로서 후 샤오 시엔은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깊은 거울을 만드는 자이기 때문일것이다. 모든 영화는 이 세계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 세계의 파편이고, 감독은 그 파편을 조립하는 자이다. 깊은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후샤오 시엔은 그 파편을 조립하여 인간이 살아가는 의미, 살아야 할 의미를 관조하게 하는 거울 만드는대가라는 사실은 <자객 섭은낭>에서도 변함이 없다.

위대한 작가에게 경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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